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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공간/문화기록

이방인 - 알베르 까뮈

by 은성 (Euni) 2025. 3. 15.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이 담백하고도 함축적인 문장으로 <이방인>은 시작된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실존주의 문학이라고 하길래 굉장히 정적인 책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스펙타클한 전개를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줄거리

평범한 직장인인 뫼르소는 어느 날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다.
그는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등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며 이후 여자친구와 희극 영화를 보는 등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이후 어떤 해변가에서 그의 무리는 아랍인과의 충돌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지인인 레몽이 칼에 찔리게 된다.
답답함을 느껴 머리를 식히러 시원한 샘 가로 홀로 간 뫼르소의 앞에 레몽을 칼로 찌른 아랍인이 나타났고,
칼을 꺼내드는 아랍인에게 뫼르소는 문득 총을 한 발, 그리고 네 발을 더 쏴서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게 된다.

 

 

감상

이 책의 해설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줄거리를 단순히 요약하는 것은 이 책을 본질적으로 감상하는 방법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어머니의 죽음에도 눈물 흘리지 않던 사람이 아랍인을 살해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다." 와 같은 납작한 줄거리만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앞 부분, 그러니까 1부의 1장부터 5장까지는 뫼르소의 평범한 일상에 가까워서 개인적으로는 평화로움과 이에 동반되는 지루함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이에 대한 뫼르소의 심상치 않은 반응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책을 읽는 독자로서 관찰자 입장에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즉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부터 책은 굉장히 흥미롭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뫼르소는 갑자기 살인범이 되어 교도소에 갇히게 되고 그의 유죄를 입증하려는 재판이 진행된다.

검사는 재판에서 이상하리만큼 말도 안 되는 논리까지 끌어오며 변론을 한다.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한, 즉 어머니의 죽음 후 뫼르소가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며 여자친구와 함께 일상을 보낸 일들을 조명하며 그가 아랍인을 죽이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계획된 범행이었다고 주장한다.

뫼르소는 읽고 있는 내가 화가 날 정도로 기괴한 이 변론을 듣고도 (본인이 포함된) 이 사건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심지어는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를 물었을 때 "햇빛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변을 한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되고, 항소도 포기한 채 사형 집행을 기다리게 된다.
그에게 교도소의 신부가 찾아와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유하지만, 뫼르소는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기쁨과 분노가 담긴 그의 마음 속에 있던 말들을 고함치기 시작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전율을 느꼈다.)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장차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모든 인간은 사형수다."
이 책의 메세지를 요약하라 하면 이런 식으로 요약되곤 한다.
이 분노의 목소리를 통해 책 내내 뫼르소가 일관적으로 취했던 무관심한(indifferent) 태도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고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소름이 돋는다.

뫼르소는 이제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세계의 무관심을 인식했고,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뫼르소의 1~5장에서의 일상적인 삶은 지루하고 평범하게 느껴졌지만,
그의 교도소에서의 생활과 비교하여 보면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했는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뫼르소는 교도소에서의 생활을 '어제내일만 있는 삶' 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우리에게 닥치는 일상은 그 자체로 현재일 것이다.

기약 없는 사형 선고를 받은 우리는 일상을 살고 있는가 교도소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게 내가 떠올린 첫 번째 감상이다.

교도소로 표현되는 사법 체계에 대해 나는 (재판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쏜 범죄 행위보다 뫼르소의 평소 행실에 대해 따지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회의 규율, 질서와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도 개인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자유를 갖지 못하는 것은 사회의 규율,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회 전체가 빠진 일종의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이는 법도와 같은 도덕적 영역 외의 것이다.)

'정상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의 기준은 개인이 그것을 좇지 않으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굴고,
우리는 이러한 피드백에 길들여진 나머지 자유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러한 가정을 하곤 한다. "한 달 뒤에 죽는다면, 지금과 같이 살 것인가?"
보통은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한 달 뒤에 죽지 않기 때문에, (더 먼 미래를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뫼르소처럼 부조리를 인식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삶을, 자신의 선택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사실 그렇게 걱정하던 일들이, 심지어 죽음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최근 삶의 모토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오늘을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늘은 오로지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만의 것이다.
이 당연하고도 망각하기 쉬운 사실을 책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교도소에서의 삶일지라도 까뮈가 '반항'이라고 일컫는 어떠한 태도를 통해 그 자체를 현재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가 떠올린 두 번째 감상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 이 감상이 맞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기 때문에 나는 까뮈의 다른 책인 <반항하는 인간>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