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7~2025.02.19) 제주 애월 일탈 여행
월요일에 문득 출근을 했는데, 그날따라 일이 너무 하기 싫더라.
생각해보니 바쁘게 지낸 나날에 비해 마지막 여행이 작년 2월 정도가 끝이었다.
리프레시가 안 된 상태로 계속 바쁘게 일만 하다 보니, 일이 더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지경까지 왔다.
그 날은 여느 때처럼 그저 친구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여행가고 싶다."
친구는 답했다.
"가... 오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 되더라.
냉정하게 지금 못 쉬면 여름까지 여행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1시 40분에 제주행 여행이 갑자기 결정되었고, 나는 화~수 양일 연차를 써두고 퇴근하자마자 당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났다.
우리 둘 모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큰(?) 결정을 대책없이 즉흥적으로 해본 건 처음이었다.
친구도 나도 제주도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이게 말이 돼?"를 연신 반복했다.
1일차의 기록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HELLO JEJU 라는 문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공항을 떠나 숙소에 짐을 풀고 숙소 바로 옆의 이자카야에서 식사를 했다.
나가사키 짬뽕과 딱새우회, 그리고 하이볼을 한 잔 곁들여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치즈에 크래커를 찍어먹는 구성이었는데, 치즈가 푸딩처럼 맛있었다. (푸딩 좋아하는 나..)
입장할 때부터 고양이 한 네다섯 마리가 우르르 돌아다녔는데 그 중 한 마리가 테이블 근처를 기웃거렸다.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식사를 마치고 용기를 내어 고양이를 쓰담쓰담 해줬다.
완전 개냥이라서 쓰다듬는 나의 손길에서 도망치지 않아주었고 새삼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오랜 욕망을 상기할 수 있었다.
2일차의 기록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거실로 나갔는데 드넓은 바다가 나를 반겨주었다.
1일차는 밤에 도착해서, 대충 저기에 바다가 있구나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바다가 가까워서 놀랐다.
오전엔 간단하게 브런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고래 장식이 가득한 신기한 카페였다.
간단한 플레이트와 식빵을 곁들여 먹는 형식이었는데 딱 '브런치'의 느낌이 나서 좋았다.
이런 아침의 여유를 느껴본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브런치를 먹은 뒤에는 한담 해안 산책로로 이동했다.
우리는 바다를 보러 왔고, 자연과 산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2일차의 메인 코스였다. 대략 만 보 정도 걸은 것 같다.
산책로는 꽤나 굴곡이 있고 바다가 정말 코앞에 있었는데, 언덕을 오르내릴 때마다 바다가 숨었다가 나타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얕은 바다는 얕은 바다만의, 깊은 바다는 깊은 바다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나는 그 중 얕은 바다가 마음에 들었다.
맑은 물과 현무암, 모래의 조화, 그리고 투명하게 비치는 연녹색 빛의 바다가 조화롭게 느껴졌다.
제주도는 공기도 맑고 물도 매우 맑았다. 도시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전원주택에 대한 로망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삶의 터전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싶은 걸까?
최근에는 막연하게 떠도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디지털 노마드들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동시에 아직은 젊다고는 생각하지만 30대가 되면 안정을 추구하고 어딘가에 정착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고, 스스로의 답을 내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변화와 성장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은 것 같다.
산책로 위편에 있는 카페에서는 수플레 팬케이크를 팔았는데, 탁 트인 뷰가 인상 깊은 카페였다.
매우 개방감 있는 카페라 2월의 날씨에서는 조금 추웠다...
로즈 밀크티를 마셨는데 향이 엄청 강했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과일 디저트를 잘 먹지 않는데 일탈 여행이기 때문에 평소에 잘 선택하지 않는 한라봉 팬케이크를 골랐다.
과일 시럽이 새콤하면서 달달했고, 전반적으로 조화로워 과일 수플레에 대한 새로운 긍정적인 인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주제는 "너그롭게 사는 방법" 이었다.
친구의 최근 고민은 자신의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주변에서 사소한 일로 신경을 거슬리게 할 때 너그롭게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날은 대화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3일차에 일기를 쓰는 시간을 보내면서 친구는 나름의 답을 내린 것 같다.
친구는 문득 "나는 바다야." 라고 말했다. 바다에 치는 파도는 온전히 바다가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분노와 같은 감정은 자신의 내면에 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뜻이었다.
이때의 경험.. 깨달음(?)을 통해 최근에는 조금 더 너그롭게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는 듯하다.
카페를 떠나서는 근처의 기념품샵에서 인형도 사고, 포토이즘에서 같이 사진도 찍었다.
사진 찍는 과정이 담긴 영상들이 역대급으로 재밌게 찍혀서 웃겼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왔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잠깐의 휴지기를 가졌다.
이때부터 약간의, 목요일이 되면 다시 회사라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도 자꾸 떠올라서 조금 속상했다.
일상과 일탈의 비율에 대해, 일탈이 일상이 되면 그건 (금전적인 면이나 여러 면에서) 현실적이지 않을 뿐더러 익숙해짐에 따라 자극이 줄어들어 결국 일탈이 일탈이 아니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 경계심이 들었다.
결핍이 있어야 욕망이 생기고 행동하게 된다는 내 최근의 생각에 따라 이번 2월의 연휴 때에 발견한 것은
불만족을 창출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 일상이 역설적으로 나의 삶에서 다른 길을 택할, 그 길을 위해 행동하게 할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 때문에 일상을 버리는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원하는 삶은, (여행에서)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기에 더 어렵게만 느껴지는 내 앞의 갈림길에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선 이미 결론을 내렸지만,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나 보다.
물론 여기에 서서 보따리를 충분히 싸야, 앞으로 걸어갈 기약 없는 여정에 배 곯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곤 있지만 하루 빨리 도전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이에 대한 사회의 통념 때문일까, 나의 일에 대한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지친 상태를 벗어나고 싶은 한 순간의 치기일 뿐일까.
여행에서 나눈 이야기 중에 일상과 일탈의 비율 중 일탈의 비율을 좀 더 늘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시되었다.
일탈이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경험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일탈이랄까, 여행이랄까.. 평소의 일상적 경험에서 벗어나는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가끔은 의도적으로 해내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서.. 저녁으로 흑돼지를 먹었는데 반찬이나 조합이 새로운 방식이라 신기하고 맛있었다.
김 장아찌? 절임? 이랑 무슨 된장맛 나는 젓갈이 있었는데 평소엔 시도하지 않는 방법으로 식사를 하니 용감해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 좋았다.
3일차의 기록
아침엔 일어나서 해물라면을 먹었다. 해물라면이 대체 뭐라고 엄청 비싸서 가성비 있는 집으로 갔다.
양은 엄청 많았지만 다시 간다면 해물라면은 굳이 싶을 것 같다. (비싼 곳도 마찬가지..)
이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친구가 숙소 근처 바다를 가까이 본 적 없으니 둘러보고 가자고 해서 잠깐 산책을 했다.
분명히 숙소에서 보던 익숙한 풍경이고, 3일이나 본 바다라 익숙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다른 각도에서 다른 방향으로 걸으며 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창문으로 봤을 땐 작게만 느껴졌던 바다가 매우 거대했다.
그리고 공항 근처의 용연 계곡으로 이동했고 산책을 이어 나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이지만 용기를 내서 흔들다리도 걸어 건넜다! (무서웠지만 케이블카나 관람차보다는 덜 흔들려서 괜찮았다.)
제주도의 신기한 점은 만나는 바다마다 각기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숙소 근처의 바다는 깊고 조용한 느낌, 애월항 근처의 바다는 생동감 있는 녹청의 느낌, 그리고 이곳 용연계곡 근처의 바다는 맑고 푸르른, 탁 트인 느낌이었다.
특히 용연 계곡은 계곡 쪽에 푸르른 풀이 돋아나 있는 이미지가 대비되고 새로웠다.
요즘 일상에 돌아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이쪽은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와 다 죽어 있는 풀만 있는 반면 제주도는 겨울임에도 야자수, 잔디, 잎이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어서 그 생명력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바람이 너무 강해서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첫날에 비행기를 예약하면서 최대한 이 일탈을 즐기고자 비행기 시간을 오후 6시로 잡았는데, 할 만한 컨텐츠가 다 떨어져서 애매해졌다.
입장한 카페에서도 수다를 떨다 문득 일기를 쓰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 글 전체는 그 일기의 재구성이다.
바다같이 살고 싶다. 그런 얘기를 했다.
바다는 규칙적이지만 불규칙적이다. 파도치듯이 살고 싶다.
언제 갑자기 크게 일어난 뒤 온 힘을 다해 부딪치고 부서져서 흩어지지만, 다시 다른 파도를 만들어내는 삶을 살고 싶다.
파도를 만들어내는 바람은 바로 세상이다. 세상의 불어옴에 그렇게 응답하면서 나만의 파도를 솟아내기도, 이로부터 부서지기도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까뮈의 시지프 신화적인 삶이 이런 걸까?)
3일 동안 바다를 보고 느낀 점은, 나는 바다의 생동감을 사랑하나 보다.
파도가 치는 소리와 터지는 물방울과 규칙적이지만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그 모습이 모두 아름답고 찬란하다.
나는 바다가 좋다. 바다 가까이에 살고 싶다. 떠다니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
이 지구의 중력은 너무나 무거워서 나를 바닥에 붙어있게만 하지만 언젠가 나는 바다가 되어 이 세상을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근거를 만들어 내자.
오늘도 이렇게 살아갈 이유를 배운다. 또 한 번...
그리고 진짜진짜 컨텐츠가 떨어졌던 우리는 이름만 듣고 캐릭터 그리기 놀이를 하였다.
뽀로로, 피카츄, 이상해씨, 뿡뿡이, 케로로 순서로 그렸다.
우파루파 피카츄, 눈이 맑아진 이상해씨와 팔다리가 공포게임 캐릭터 비율이 된 뿡뿡이는 지금봐도 웃음벨이다.
카페에서는 조금 일찍 나와서 공항까지 약 40분을 걸어가기로 했다.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좋았다.
제주도 세 달 살기.. 그런 것을 해보고 싶다고 얘기하면서, 동시에 가장 좋은 삶은 도시에서 인프라를 다 누리면서 여행을 자주 가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는 바다 근처의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었는데 가족, 친구와의 거리라든지 사업 인프라라든지 때문에 회사를 다니지 않더라도 너무 멀리 가면 힘들 것 같더라. (최근의 목표 지역은 강원도였지만.. 여기도 교통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수도권 내륙에는 바다가 없는걸.. 일단은 면허부터 따야될 것 같다.
아무튼 공항까지 무사히 걸어가서, 기념품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3일만에 보는 집은 꽤나 반가웠다. 그렇게 나의 3일 간의 일탈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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