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까뮈는 '자살'이라는, 흔하고 가깝지만 또 어려운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은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고, 이에 자살을 하게 된다.
우리의 습관적인 삶을 배반하고 고의적인 죽음을 택하게 만드는 그것은 무엇인가?
까뮈는 이러한 자살을 택하게 하는 것이 부조리의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며,
자살과 부조리의 관계를 밝혀내고 자살이 정말 부조리에 대한 해답인가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부조리의 감정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통일하는' 것이다. 이는 곧 친숙함에 대한 요구이며, 분명함에 대한 갈망이다.
인간에 있어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뿐이다.
그리고 또한 인간을 좌절케 하는, 인간의 삶에 무엇보다도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일상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각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참된 인식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 "그것을 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속의 이 마음, 나는 이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이 세계, 나는 이 세계를 만질 수 있으며 이것 역시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나의 모든 지식은 여기서 멈춘다. 그 밖의 것들은 만들어 낸 것이다.
가령 나 자신이 확신하는 자아조차 막상 포착해 보려고 하면, 그것을 정의하고 요약해보려 하면, 그것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에 불과해지니 말이다.
나는 그 자아가 지닐 수 있는 모든 모습, 남들이 그것에 부여한 모든 모습, 즉 교육, 그 기원, 그 열정 혹은 그 모든 침묵, 그 위대함 혹은 그 저속함 등을 하나하나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합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 것인 이 마음 자체조차 나에게 영원히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머물 것이다.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갖는 확신과 내가 그 확신에 부여하려는 내용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은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영원히 이방인일 것이다.
- 시지프 신화, 38p
부조리의 보존
정리하자면 비합리적인 세계와, 합리적인 인간 이성이 맞대면할 때 부조리의 감정이 발생한다.
(호소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부조리는 세계 혹은 인간, 어느 한 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며, 양자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까뮈는 이러한 부조리가 본질적인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탐구의 첫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이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 부조리를 '보존'해야 한다는 부분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독서 모임에서의 의문이 있었다.
- 나는 보존이 능동적인 행위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한 쪽을 해소하지 않는 이상 부조리의 해소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차원에서 이를 지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라고 해석했다.
- "이를 은폐하거나, 이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제 막 그것을 끊임없는 상호 대조와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이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서 나는 이 투쟁이 희망의 전적인 부재(≠절망), 계속적인 거부(≠포기), 의식적인 불만족(≠불안)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요구를 파괴하거나 은폐하거나 교묘히 비켜 가거나 하는 모든 것(그 중에서도 특히 이혼, 즉 절연을 파괴하는 동의[자살])은 부조리 자체를 파괴하고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태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부조리는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 시지프 신화, 54p
까뮈는 실존철학들이 '도피'를 권하고 있다고 말하며, 키르케고르, 셰스토프, 후설 등의 철학을 검토하며 비판한다.
까뮈는 이러한 철학적 태도가 '철학적 자살(한 사상이 그 자체를 부정하고 바로 자기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경향)'이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조리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
나는 이 상태에서의 삶의 규범을 묻는다.
- 시지프 신화, 65p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 낼 것이다.
- 시지프 신화, 66p
부조리한 인간
우리는 이러한 부조리를 항상 인식해야 한다. [항구적인 혁명]
부조리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파악하려는 정신의 헛된 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반항과 통찰력을 갖게 된 채로 삶으로 복귀한다.
그는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 시지프 신화, 81p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
반항은 매 순간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삼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 뿐이다.
- 시지프 신화, 83-84p
부조리와 자유
까뮈는 '자유'라는 개념을, "개인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즉시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그 의미를 상실하는 개념"이라고 말하며,
일반적인 자유 개념('자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신이 아는 유일한 자유는 정신과 행동의 자유일 뿐이라 말한다.
부조리는 죽음을 통해 나의 모든 자유의 기회를 소멸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행동의 자유를 돌려주고, 강화시키는 것이다.
부조리를 만나기 전의 일상적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이나 미래나 정당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살아가고,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인 마냥 행동한다.
하지만 필연적인 죽음[부조리]을 마주하는 순간, 이 모든 미래를 가능케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자유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죽음에 있어서 영원한 노예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고, 어떠한 환상으로부터의 속박에 매여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그 결과 나는 가족의 아버지(혹은 기술자, 민족의 지도자 혹은 우체국 견습 직원)로밖에 행동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이 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것이 되기보다 이것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그것은 무의식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주위 사람들의 믿음과 내가 속한 인간 사회의 편견(타인의 자유에 대한 확신과 이로부터 발생한 흐뭇해하는 기분은 전염성이 강하다)에 대한 나의 가정을 지탱한다.
- 시지프 신화, 88-89p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만의 진리, 존재하는 방식 혹은 창조하는 방식에 부심함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 시지프 신화, 89p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까뮈는 이렇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으로부터 깊은 자유를 얻는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까뮈는 삶이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양의 철학'을 말한다.
부조리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경험의 질을 양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 시지프 신화, 92p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다.
가능한 자주 세계와 접촉하면서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유일한 손해란 너무 이른 죽음 뿐이다. 죽음은 운의 문제일 뿐이다. 운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 '소진하는 삶' 이라는 키워드가 나에게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와닿았던 말이며, 이 책을 읽은 뒤로 나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정의할 때 인용하게 되는 말인 것 같다.
- 까뮈의 실제 생애는 그의 철학을 철저하게 뒷받침한다. 그는 일평생 직업에 구속되지 않은 채로도 생계를 유지하고 살았으며 한 순간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삶의 양상부터 죽음의 형태까지 그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실행한 삶이라는 점이 굉장히 감명 깊었다.
시지프 신화
신들의 일에 개입하고, 신을 속인 죄로 영원히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 시지프.
하지만 산꼭대기에 다다르는 순간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져버리고 만다.
신들은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유 있는 생각이었다.
- 시지프 신화, 179p
까뮈는 이러한 시지프를 '부조리한 영웅'이라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의 신화를 이야기할 때, 그의 생전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지옥에서의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까뮈는 바로 그 지옥에서의 삶에 주목한다.
- 까뮈는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시지프가 돌을 굴려올리는 행위에 비유한다.
시지프의 신화에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의 온통 인간적인 확실성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측량할 수 있을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 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 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 시지프 신화, 182p
까뮈는 시지프가 산꼭대기에 다다른 이후, 돌이 다시 굴러 떨어졌을 때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바로 그 휴지의 순간에 주목한다.
바로 그 휴지의 순간에 떠오르는 의식이 이 이야기를 가장 비극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는 희망이란 없음을 의식함에도 산을 걸어 내려간다.
그가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모든 순간에,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고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시지프 신화, 183p
부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행복을 찾게 된다.
그러나 세계는 오직 하나 뿐이고, 그런 점에서 행복과 부조리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내가 판단하건대 모든 것이 좋다.
까뮈는 오이디푸스의 이 말을 인용한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불만과 고통마저도 삶으로 포용하게 된다.
우리는 신을 바라지 않게 된다. 구원을 바라지 않게 되며, 오로지 스스로 처리해야 할 인간의 문제로 만들게 된다.
까뮈는 바로 이곳에 시지프의 기쁨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죽음에 관한 것 외에,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인생은 시지프가 돌을 굴려 올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하는[창조한] 모든 행동은 곧 기억이 될 것이며, 죽음으로 인해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지프는 돌을 굴려 올린다.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돌을 굴려 올리는 것이 끝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의 성실성은 신성하다. 그의 마음은 오직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으로 가득 찬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후기
내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 세 명을 꼽자면 흄, 쇼펜하우어, 그리고 까뮈일 것이다.
흄의 경험주의와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통찰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고,
쇼펜하우어의 고통과 욕망에 대한 이론과 까뮈의 부조리에 대한 고찰,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된 소진하는 삶이라는 키워드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나의 고민에 답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삶에 대해,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철학책들에 비해 난이도가 쉬운 편이며, 까뮈 특유의 문학적인 문체는 책에 더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슬픔보다는, 경외심이나 벅차오름에 가까운 감정이다.
삶에 대한 문제는 항상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생길 때마다 읽으려고 최대한 원본 내용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기록을 해봤다.
생략된 부분도 많지만, 실존 철학에 관한 부분은 대부분 담아내서 꽤나 만족스럽다.
책에 흥미가 생긴다면, 마지막 챕터인 <시지프 신화> 부분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참고로 나의 다른 플랫폼 블로그를 폐쇄하면서 글을 그대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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